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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작성 박치화, 상해 臨政 중책·활동기록 발굴 - 임정 법무원 법률판리사 겸 경남도찰리사·재무모집기주원 맡아…법무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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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대한독립선언서’(2015년 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 독립기념관 소장)[환경신문]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는 1919년 3월 하동에서 지방 유일의 독자적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선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일산 박치화 선생이 3·1운동 이후에도 상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박치화 선생의 후손이 제공한 자료와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박치화 선생 신임장과 통지서에서 선생의 활약상이 담긴 내용을 3·1운동 100년 만에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문건을 분석한 정 소장은 “1927년 10월 상해 임정에서 선생에게 수여한 신임장과 통지서로 임시정부 대통령서리 겸 법무총장 이동녕이 임시정부의 협의를 거쳐 박치화에게 ‘법무원 법률판리사 겸 경상남도찰리사’와 임정 재무모집기주원 등의 직책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직책은 임정의 법무 군무 재무를 통괄한다”며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중책으로 선생에 대한 신임이 컸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문건은 지난해 3월부터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군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와 지난달 정재상 소장이 윤상기 군수와 김경수 도지사에게 보낸 박치화 선생 생가 복원과 기념관 및 공훈비 건립,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문화재등록에 관한 서한문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박치화 선생의 종손자 박명신씨의 자료 제공과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문서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14일 하동군 적량면 면장 직을 돌연 사직하고, 전국에서 지방 유일의 독자적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3월 18일 하동장날 장터에서 12인이 함께 선포, 영호남 지역민 1500여 명과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이 독립선언서로 인해 하동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총 17회가 일어났으며, 연인원 1만 2000∼1만 4000명이 참여하고 17명 사망, 95명 부상, 50명이 투옥됐다. 이는 영남에서 가장 많은 횟수의 만세 열기로 이어졌고, 영호남 지역 만세시위를 더욱 촉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2015년 국가지정 기록물 제12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선생에 관한 기록은 일제가 작성한 판결문과 고등경찰관계적록 등에서 알 수 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적량면 박치화 수모자는 3월 18일 하동읍 장날을 이용해 시장 내에 쌓아둔 판매용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구한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모여든 군중 1500여 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하동경찰서에서 20여 명이 출동해 수모자를 검거하고 진압했다’고 했다.

이같은 일로 선생은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선생은 당시 재판 과정에서도 기백은 꺾이지 않았고 당당하게 항일의지와 대한독립을 외침으로써 민족 지도자로서의 기개와 위엄을 보여 일본판사도 감동했다고 전해온다.

이에 진주법원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하고 석방하려 했으나 검사가 형이 낮다며 2심법원에 공소해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아우 박문화도 선생의 지도하에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박문화는 1919년 4월 4일 하동공립보통학교 동교생인 염삼섭·정점금·전석순 등과 뜻을 같이하고 4월 7일 학생 약 130여 명과 태극기를 흔들면서 학교를 뛰쳐나와 하동읍 시장을 향해 구보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그 일로 체포돼 진주법원에서 태형 90도를 받았다.

선생의 아들 박성무 또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박성무는 그의 숙부 박문화가 살고 있던 전북 정읍에서 1933년 정읍공립농업학교 3학년 김민옥·최대열 학생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다 1934년 5월 체포돼 같은 해 9월 17일 전주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다.

선생의 가족 3인이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선생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국권을 회복하자 선생은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1947년 7월 5일 지금의 전북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서 괴한의 흉탄을 맞고 피살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68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대전국립현충원 제4묘역 117호에 안장했다. 그리고 아우 박문화에게는 1998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제3묘역 470호에 안장했다.

윤상기 군수는 “이번 문건 발굴은 박치화 선생의 생가복원과 근대문화유산 등록, 공훈비 건립, 독립기념관 건립,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문화재 등록에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며 “연내에 그가 태어나고 살아온 마을에 박치화 지사 공훈비를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정재상 소장은 “박치화 선생은 3·1운동 이후의 활동에 대해 그동안 알려진 바 없었다”며 “임시정부에서의 활약상이 담긴 문건의 발굴은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컸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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